몇 해 전, 한 중견 화학제품 제조사로부터 자문 의뢰를 받았다. 독일 거래처로 수출한 제품에 품질 클레임이 걸렸고, 거래처는 계약 해제와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그 회사의 영문 매매계약서를 펼친 순간 — 준거법 조항이 한 줄로 적혀 있었다. "This Contract shall be governed by the laws of the Republic of Korea."

한국법이 준거법이라고 적혀 있으니 — 그 회사는 자연스럽게 한국 민법과 상법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분쟁의 핵심 법규는 한국 민·상법이 아니라 —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 줄여서 CISG(또는 비엔나협약)이었다.

그날 회의실에서 처음 그 사실을 들으신 의뢰인 대표님의 표정은 — 자주 보게 된다. 한국이 2004년에 가입하고 2005년부터 발효된 이 협약이 — 우리 중견기업의 일상적인 수출입 거래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그 거래의 당사자들이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글의 목차

한국 중견기업이 가장 자주 놓치는 다섯 가지를 정리한다.

하나, CISG는 한국법보다 우선해 적용된다

CISG는 헌법 제6조에 따라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 조약이다. 대법원은 그 적용 우선성을 거듭 확인해 왔다 — "우리나라가 가입한 국제조약은 일반적으로 민법이나 상법 또는 국제사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대법원 2022. 1. 14. 선고 2021다269388 판결 등의 취지)

즉 — 준거법을 "대한민국법"으로 약정해 두었더라도, 그 거래가 CISG 적용 요건을 충족하면, 우선 CISG가 적용되고 CISG가 다루지 않는 영역에서만 한국 민·상법이 보충적으로 적용된다.

둘, 적용 요건은 두 가지 — 의외로 간단하다

CISG 제1조 제1항은 적용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 당사자의 영업소가 서로 다른 국가에 있는 물품매매계약에 대해, (a) 양국이 모두 협약의 체약국인 경우, 또는 (b) 국제사법의 규칙에 따라 체약국의 법이 적용되는 경우에 CISG가 적용된다.

한국은 2026년 현재 약 100개에 가까운 협약 체약국 중 하나이고, 우리의 주요 무역 상대국(미국, 중국, 독일, 일본은 비체약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다수 체약국이다. 따라서 한국 회사가 미국·중국·독일·프랑스 회사와 물품을 매매하면 — 별도의 적용 배제 합의가 없는 한 — CISG가 적용된다.

한 가지 자주 오해되는 지점이 있다. 일본은 2008년에 CISG에 가입했으나, 한국은 협약 가입 시점에 협약 제95조에 따른 유보 선언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회사 입장에서는 — 상대방의 영업소가 체약국에 있기만 하면 — 광범위하게 CISG가 적용된다.

셋, 한국 민법과 다른 — 위험 부담과 책임의 구성

CISG는 한국 민법의 채무불이행 책임과 담보책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계약위반(Breach of Contract)" 하나의 체계로 묶는다. 매도인의 물품 부적합(Non-conformity), 매수인의 대금 지급 지연, 인도 지연 — 모두 계약위반의 한 유형으로 다뤄진다.

실무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지점은 "본질적 계약위반(Fundamental Breach)"의 개념이다. CISG 제25조는 — 계약위반이 본질적이어야 — 상대방이 계약 해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정한다. 한국 민법의 채무불이행에 의한 해제권보다 상대적으로 그 문턱이 높다.

넷, 통지(Notice)의 시한이 결정적이다

CISG 제39조는 — 매수인이 물품의 부적합을 발견하거나 발견할 수 있었던 때부터 "합리적인 기간 내에" 매도인에게 그 부적합의 성질을 특정하여 통지하여야 한다고 정한다. 또한 매수인이 인도일로부터 2년 이내에 통지하지 아니하면 — 부적합을 주장할 권리를 상실한다(같은 조 제2항, 동조 단서 — 보증기간이 더 긴 경우 예외).

이 "합리적 기간"의 해석을 두고 — 각국 법원이 다소 다른 입장을 보여 왔다. 독일 법원은 1주일 정도를 기준으로 좁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 법원은 사안에 따라 수주에서 수개월까지 다양하게 본다. 매수인 측이 분쟁의 핵심 무기를 잃는 가장 흔한 경로가 — 이 통지 시한을 놓치는 것이다.

다섯, "CISG의 적용을 배제한다"는 한 줄

CISG 제6조는 — 당사자가 협약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그 효력을 변경할 수 있다고 정한다. 즉, 우리가 협약 적용을 원하지 않으면, 계약서에 한 줄을 넣으면 된다.

"This Contract shall be governed by the laws of the Republic of Korea, excluding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Contracts for the International Sale of Goods (CISG)."

이 한 줄이 들어가지 않은 한국법 준거 계약서는 — CISG 적용권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적용 배제만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 매도인 입장에서는 본질적 계약위반의 높은 문턱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매수인 입장에서는 통지 시한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거래의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CISG 적용 여부 자체가 협상 항목이 된다.

마지막으로 — 영문 계약서를 검토할 때

실무 체크포인트

국제 매매계약서를 검토할 때 — 다음을 차례로 확인한다. ① 거래 상대방 영업소의 국가가 CISG 체약국인지, ② 준거법 조항에 CISG 적용 배제 문구가 있는지, ③ 통지·해제·손해배상 조항이 CISG의 어느 조문을 전제로 작성되어 있는지, ④ Incoterms와 CISG가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지. 이 네 가지가 정리되면 — 그 계약서는 분쟁 시 의지할 수 있는 문서가 된다.

그 화학제품 회사의 사건은 — 결국 — 본질적 계약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우리 측 주장이 받아들여져, 매수인 측의 해제 요구를 차단하고 잔여 대금의 일부 감액으로 합의했다. 사후에 그 의뢰인 대표님과 식사 자리에서 — 다음 거래부터는 CISG 적용 여부를 LOI 단계에서 정해 두기로 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변호사가 받을 수 있는 — 가장 좋은 종류의 보고였다.

참고 법령·자료

  1.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CISG) 제1조, 제6조, 제25조, 제39조
  2. 대법원 2022. 1. 14. 선고 2021다269388 판결 등 (협약의 우선 적용)
  3. 외교부 보도자료,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국제연합협약 가입" (2004. 2.)
  4. 석광현, "국제물품매매협약(CISG)과 국제사법" (2010)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과 변호사의 실무 단상을 담은 글로,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글에 등장하는 사례는 여러 사례의 요소를 가공·결합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변호사와의 상담을 권해 드립니다.

이와 유사한 사안이라면, 1차 상담은 부담 없이.

사안의 윤곽만 알려주시면 가능한 선택지·일정·비용을 먼저 정리해 드립니다. 채권자 신청·만기 임박 등 급한 경우 전화가 가장 빠릅니다.

상담 문의하기 02-6747-6565 카카오톡 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