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쯤이었다. 사무실 창 밖으로 비가 왔다. 우산 받쳐 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그 너머로 서울중앙지방법원 건물이 평소보다 어두운 색으로 서 있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자주 듣는 표현 중에 "서초동 라이프"라는 말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일종의 자조 섞인 농담쯤으로 여겼다. 법원과 검찰과 로펌이 빽빽한 이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고 비슷한 시간에 야근을 한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도 옆 테이블에서 비슷한 종류의 대화가 들린다. 사건번호, 판결 요지, 인지대.
어느 시점부터 그 표현이 농담만은 아닌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은 한 회생기업의 변제계획안 초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1년 가까이 따라온 사건이었고, 인가까지 가는 길이 거의 다 보이는 단계였다. 마지막으로 채권자협의회에 낼 청산가치 비교표의 숫자가 미세하게 맞지 않아 회계법인 보고서를 다시 확인하던 중이었다.
비가 굵어졌다. 평소 같으면 모니터만 보고 있었을 텐데, 그날은 창문이 자꾸 시선을 끌었다.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산 두세 개만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자정 가까운 시간에 이 거리 어딘가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다른 변호사들의 사무실 불빛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내일 아침 공판 준비서면을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매수인 측 변호사의 마지막 코멘트에 답을 쓰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어제 만난 의뢰인의 사정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 동시에 켜져 있을 노란 불빛들이 그날 밤은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혼자 일하는 직업처럼 보이지만
변호사는 다른 사람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가까이서 보는 직업이다. 그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우리가 옆에 앉는다. 회생을 결심하는 대표님의 식어 가는 커피 잔 옆에. 경영권을 잃을지도 모르는 가족 기업의 회의실 형광등 아래에. 해외 거래처로부터 클레임 통지서를 받은 회사의 책상 위에.
그런 자리에서 변호사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을, 이 일을 하면서 점점 더 자주 느낀다. 가장 비싼 변호사도, 판례를 가장 많이 외고 있는 변호사도 결국 의뢰인의 결정을 대신 내릴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길의 지도를 그려 드리고, 각 길의 비용과 시간과 위험을 정직하게 적어 드리고, 마지막에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이다.
그게 작은 일은 아니라고, 그러나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그 비 오는 밤 사무실에서 다시 한번 마음에 적어 두었다.
그날 밤의 끝
결국 그날 밤 청산가치 비교표의 숫자는 4호 자산 평가표의 한 줄에서 단순한 오타로 밝혀졌다. 11시 50분쯤 회계법인 담당자에게 카톡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정정된 보고서가 도착해 있었다. 그 회사는 두 달 뒤 인가 결정을 받았고, 지금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날 사무실의 노란 불빛을 떠올릴 때마다, 서초동 다른 건물 어딘가에서 같은 시간에 깨어 있던 누군가에게 늦은 인사를 보내고 싶어진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같은 종류의 일을, 같은 시간에 하고 있었다.
비 오는 밤이면 이 동네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단상으로 적은 글입니다. 글에 등장하는 사례는 여러 거래의 요소를 가공·결합해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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