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한 차례 지나간 다음 날 오후였다. 우편물을 정리하다가 손글씨로 주소가 적힌 두꺼운 봉투 하나가 다른 우편물 사이에서 조금 다른 느낌으로 손에 잡혔다.
발신인 이름을 보고 잠시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두 달 전 마무리한 한 사건의 의뢰인이셨다. 정확히는 그 의뢰인 회사의 대표님의 어머님이셨다.
그 사건
그 사건은 사실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었다. 회사 규모로 보면 작은 편이었고, 분쟁 금액도 우리 사무실의 통상적인 사건 평균에서 보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다만 그 회사 대표님께서 처음 상담을 오셨을 때 60대 후반이셨고, 어머님과 함께 회사를 거의 평생 운영해 오신 분이셨다. 어머님께서 회사 창업자이셨고, 80대 중반의 연세에도 가끔 사무실에 나오셔서 회계장부를 직접 보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런 회사에 한 거래처의 일방적인 대금 미지급으로 사실상의 자금 위기가 짧은 시간 안에 닥쳐 왔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 한 건의 채권 회수가 단기적인 생사를 가르는 정도의 비중이었다.
가압류, 채권추심, 본안 소송, 거래처와의 협상이 3개월쯤에 걸쳐 동시에 진행되었다. 다행히 2개월 반쯤 지난 시점에 거래처가 분할 변제에 합의했고, 회사는 자금 위기에서 벗어났다.
사건이 마무리되던 날 마지막 미팅 자리에서 대표님은 그분 식의 단정한 인사를 하셨다. 어머님은 그날 사무실에 못 오셨다.
두 페이지의 손글씨
그날 도착한 손편지는 그 어머님께서 보내 주신 것이었다.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펴 보았다. 80대의 단정한, 그러나 손이 조금 떨리신 듯한 글씨가 두 페이지에 빈틈없이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는 사건에 대한 짧은 감사 인사였고, 두 번째 페이지는 어머님께서 평생 회사를 운영하시면서 겪으셨던 비슷한 위기들에 대한 짧은 회고였다.
마지막 줄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변호사님, 저희 회사 같은 작은 회사의 작은 사건도 큰 회사 일처럼 끝까지 봐 주셨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줄에서 글씨가 살짝 흔들려 있었다.
책상 옆 작은 서랍
한참을 그 편지지를 책상 위에 펴 둔 채로 앉아 있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의외로 자주 외로운 직업이다. 사건이 한 건 끝나면 다음 사건이 이미 책상 위에 쌓여 있고, 의뢰인은 잘 끝난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가신다. 한 사건에 우리가 어떤 마음과 시간을 들였는지를, 의뢰인 입장에서 매번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이런 편지 한 통이 도착하는 날에는 책상 앞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그분이 80대 중반의 손으로 두 페이지를 천천히 적으셨을 그 시간을 떠올렸다. 한 줄을 적으시고 잠시 멈추셨다가 다음 줄을 다시 시작하셨을 그 사이의 호흡들을 떠올렸다.
그 호흡들이 결국 우리 직업의 의미라는 걸 그날 다시 알았다.
편지를 정리해서 책상 옆 작은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 서랍 안에는 사실 비슷한 편지가 몇 통 더 들어 있다. 어떤 분은 손편지를, 어떤 분은 짧은 카톡을, 어떤 분은 사무실 앞으로 작은 화분을 보내 주셨다.
그것들이 그날그날의 변제계획안 초안이나 답변서 파일 옆에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어느 늦은 오후에는 그 서랍을 한 번 열어 본다.
그러면 다시 한 줄을 더 쓸 힘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변호사로서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정말로 한 사람의 직업을 평생 지탱한다는 걸, 이 일을 하면서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 가고 있다.
오늘은 사무실 옆 책상 위의 그 서랍에 가만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단상으로 적은 글입니다. 글에 등장하는 사례는 여러 사례의 요소를 가공·결합해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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